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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스토리

10년후, 한국 _ 공병호

10년후, 한국

공병호

 

첫째, 한국의 현재 : 무엇이 문제인가

1. 주력산업이 흔들린다.

2. 떠나는 기업들, 사라지는 일자리

3.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

4. 더 이상 우리는 없다.

5. 약진하는 진보 진영

6. 제대로 된 시대정신이 없다.

7. 위험한 민중주의의 유혹

8. 약진하는 노동조합

9. 한국의 교육, 희망은 있는가

10. 악화되는 재정 적자

11. 대미 외교, 감정만으로는 안 된다.

12. 시대를 거스르는 민족주의

13.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

14. 세계화, 결코 피해갈 수 없다.

15. 한국 경제를 뒤흔드는 차이나 쇼크

16. 깊어가는 세대간 갈등

 

둘째, 10년 후 한국 :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1. 좌향좌와 우향우, 어디로 가야 하나

2. 침몰이냐 부상이냐

3. 여전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한국의 위기 :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1. 경제 원리보다 정치 원리

2. 한국에 시장경제는 없다.

3. 추락의 7가지 원인

 

넷째, 미래 준비 :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1. 공동체

2. 기업

3. 개인

 

한국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린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2002년 기준으로 4,766억 달러, 세계 12위이다.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실질적인 비중은 어떨까. 2002년에는 54%, 2003년에는 59.8%에 이른다. 갈수록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수출산업과 그 상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미래를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반도체.자동차.무선통신기기.컴퓨터.선박 같은 5대 주력품목이 우리 수출의 43.2% 이상을 차지하고 잇는데, 그 비중은 해마다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석유제품.합성수지.철강판.영상기기.자동차부품을 추가한 10대 품목은 54.8%에서 56.6%, 57.9%로 그 비중이 더욱 높다.

이처럼 한국의 수출을 견인하는 5~10가지 산업은 1970년대에 씨앗이 뿌려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결처 집중적으로 육성되어 온 장치산업들인데, 막대한 설비 투자를 요구하는 이들 산업이 지금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장치산업에서 일하는 경영자 모씨는 “중국의 무한정한 설비투자가 완결되는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한국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중국은 거의 전 업종에 걸쳐 이미 광잉 설비 상태에 있고,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내의 과잉 설비는 덤핑이라는 모습으로 해외 시장을 교란하게 될 테고, 이미 경공업 제품을 재패한 지 오래인 중국은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제품에서 가격결정권을 쥐게 될 것이다.

이처럼 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이 설비 자체를 해외로 이전한다면,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다수의 중소기업들은 그와 JGKArO 문을 당을 수밖에 없다. 설비 투자를 주저하는 분위기는 이미 LGHKRTKS 일로에 있다. 혹자는 경기 불황에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 산업의 근원적인 경쟁력 상실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잘 나가는 한국 기업들의 실상

병: 싼 인건비로 위험 부담 없는 단순한 기술만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사온 기술을 이용, 빨리 시장에 제품을 내놓으려면 구태여 경험 많고 비싼 인력을 쓸 이유가 없지요.

1980년대, 일본은 경쟁이 치열한 많은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경고였다. 이 시점 이후로 종래 성공적이었던 다양한 사업들이 국제적으로 지위가 실추되는 아픔을 격어야 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성공 스토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앞으로 거대한 설비를 갖춘 공장들이 폐허화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텅 빈 공단을 아파트 단지로 활용하는 일외의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문제는 우리를 괴롭히는 고민이 될 것이다.

10년 후 한국을 대표하는 두 단어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이 될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정치적 수사가 늘어나겠지만, 책임질 만한 사람들이 장기적인 계획과 소신을 갖고 난제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불행하게도 거의 없어 보인다.

 

해외로 이전하는 공장들

삼성전자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자레인지 생산시설을 지난 달 완전히 철거했다. 25년 만이었다. 전체 전자레인지의 20%를 생산해 온 수원 공장 라인을 철거한 이유는 중국 업체들의 계속된 가격인하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수원 공장에서만 최대 600여 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삼성전자는 국내 PC 생산라인도 2005년까지 모두 해외로 이전할 계획이다.

이렇듯 해외 이전이 계속된다면 근로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자영업을 시작해 대기업에 있을 때보다 나은 생활을 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보수나 후생복지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의 무게중심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이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89년만 하더라도 제조업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7.8%였지만 2002년에는 19%로 떨어졌는데, 반면 서비스업은 45%에서 63.3%로 증가했다. 제조업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서비스업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서비스업과 제조업은 각각 55.1%와 30%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점이다. 현재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업에 취업한 개인의 1인당 실질 부가가치는 제조업의 45% 수준이다. 서비스업의 팽창이 근로자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1995~1999년에는 한국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 평균치는 미국의 45%, 일본과 프랑스의 49%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요식.숙박.부동산중개 같은 서비스업의 경우는 제조업에 비해 최종 수요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생산 유발 효과가 낮다. 서비스업이 다른 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지 않은 것이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한국은 아파으로도 무척 큰 시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청년 실업은 단순히 경기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한국 경제가 맞게 될 가혹한 ‘일자리 전쟁’의 전주곡이란 생각이 든다.

 

기업가정신은 실종되었는가

앞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을 일으켜 사람을 고용하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해 돈을 벌려는 욕구는 상당히 가라않게 될 것이다. ‘making money'를 향한 열정은 여전하겠지만 ’making stuff'를 통해 돈을 벌려는 열정은 현저하게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누구 좋으라고 사업을 하나

바몰 교수의 논눈 [기업가 정신:생산적,비생산적 그리고 파괴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기업가란 자산의 부와 권력, 명예를 확대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업가가 목적 달성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사회적인 측면에서 생산물을 추가하느냐 아니냐는 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즉 그들의 선택이 사회적 생산에 실질적인 방해가 될지라도, 사적 이익의 추구가 사회적 관점에서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그들이 고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업가정신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슘페터 류의 기업가정신, 즉 혁신과 개선을 통해서 발휘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뇌물이나 부동산 투기처럼 ‘비생산적인 기업가정신’ 역시 엄연히 기업가정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사회의 역동성이나 발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기업가정신이 생산적인 분야를 향해 분출될 때 비로써 한 사회의 발전이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그렇다면 기업가가 생산적인 분야와 비생산적인 분야에 에너지를 안배하는 데는 어떤 요소들이 영향을 미칠까? 바로, 사회가 지불하는 보상 체계이다. 보상 체계에서는 수익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 인정 같은 요소도 중요하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보상 체계가 잘 되어 있는 경제는 그렇지 못한 경제보다 훨씬 빠르게 번영과 성장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현금 중시 경영의 복귀라는 대세를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리스크 회피 사회’로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움직임을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위험이 없다면 과실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리스크를 기꺼이 안으려는 사람들이 현대판 모험가이자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번 조국은 영원한 조국인가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막연히 감정적인 애착을 갖고 소속감을 느낄 때가 많다. 고향, 모교, 조국 모두가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주요 독자들은 젊은 세대에 비해 고향이나 모교, 조국에 좀더 강한 애착을 가진 세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영속적인 관계로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이 땅에 태어났기에 한번 조국은 영원한 조국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라나 앞으로는 영속적이라고 여겨졌던 관계들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해외로 나갈 기회가 많거나 외국 문물을 자주 접촉하는 계층 가운데 특히 그런 이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개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사는 사회를 여러 면에서 비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정치적 지형의 변모에 따라서도 큰 영향을 받으리라고 본다.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제도 변화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면, 여유 있는 계층 사이에 이같은 현상은 소리 없이 확산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과거처럼 큰 관심을 갖지 않을 텐데,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삶을 꾸려가는 장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이민을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준 이민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이 떨어지면 공동체를 위한 기부나 자선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익숙하기 때문에 조국에서 살아가긴 하지만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사회란 선택 가능한 장소 중 하나일 뿐, 납세나 군복무 같은 최소한의 법률적 의무를 넘어 어떤 도덕적인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꽤 늘어날 전망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유 있는 그들에게 공동체의 이익과 이상을 위해 양보와 희생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직접 측정할 수는 없지만, 사업가들이 이 땅을 떠나가거나 과거 열심히 하던 사업을 접어버리는 현상들을 보면, 그것은 어느 정도 추측 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체면 등 타인의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 여력이 허락하는 한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귀찮다 그냥 재 재산을 나를 위해, 자식을 위해 사용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유학 가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은 단순히 교육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외로해외로

한국이란 공동체에서는 이제 ‘우리’라는 개념을 재해석하는 일들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보다는 경제력을 중심으로 동질성를 갖기 시작했으며 계층 간 심리적, 정서적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동시대에 같은 땅 위에 살고 잇지만 고유할 수 있느 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앞으로 10년 동안은 이런 일들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지는 않겠지만, 차츰 심화되어 갈 것이 분명하다.

한편 30대 전후의 프로페셔널들은 조국에 대한 애착이나 감정을 털어버리기에 훨씬 손쉬운 세대다. 전문적인 기술과 외국어 소통 능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삶의 질과 자녀 교육 때문에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될 것이다. 유능하고 젊은 프로페셔널들은 굳이 생물학적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테고, 이미 자리를 잡은 세대들과는 달리 살아갈 날이 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평등한 세상이라는 이상주의

앞으로는 ‘가진 자’ 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간격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등장할 것이다. 빈부격차를 이용해 대중의 환심을 사야 하는 사람들에게 향후 10년간은 좋은 시적이 될지 모른다. 본래 인간이란 사실을 믿는다기보다 사실이기 바라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을 파는 사람들은 앞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꾸준하게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한 진보 정당이 새로 결성되기도 하겠지만, 기존 정당에서도 진보적인 경향을 띤 사람들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진보가 그리는 세계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주체는 누구인가.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 해답을 시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서 찾는다. 정치를 통해, 가진 자와 그 주변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수단으로 돈을 갹출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면 원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생을 통해 산전수전을 경험한 세대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런 이상주의를 믿지 않는다. 이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 본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보가 무엇인지 보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척박한 상황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 오면서 ‘자립’ 혹은 ‘자립자존’을 체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소외된 사람들이 무슨 단체를 만들어 잘사는 사람들 집 앞에 몰려가 춤판을 벌이는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스스로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보수적인 세계관을 갖고 사는 세대들은 그러나 이미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류가 아니다.

 

보수는 게임에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본래 재산을 갖게 되면 과격해지지 않는다. 잃을 것을 갖게 되면 온순해지게 마련이다. 반면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절박하기 때문에 과격해질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을 쥐는 게임에서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맹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게임에서든 보다 절박한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우선 경제. 정치. 사회. 외교.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위한 법안들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합동 작전에 의해 속속 통과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책들은 대개 정치 원리에 충실하며, ‘법의 지배’라는 원칙을 어기는 경우도 있으리라는 점이다.

정치 원리가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 원리가 후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경제 원리를 무시하고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지금 세상의 거대한 흐름이건만, 유독 우리만 좁은 한반도의 틀에 묶여 정치원리에 의해 부를 나눠 갖는 게임에 몰두할 가능성이 높다.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선의의 프로젝트에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마 수구 반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세월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선의의 프로젝트가 그토록 보호하려 했던 이들을 오히려 중. 장기적으로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임을 알지만 이미 자신들은 소수로 전락해 버렸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외관상 자유시장 경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체제로 나아갈 것이다. 나누어 갖기 위해서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길밖에 없다. 세원 확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될 텐데, 역시 가장 좋은 세원은 소득이 확연히 드러나는 봉급생활자들이다. 물론 ‘부유세’처럼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또한 특정 목적의 비용을 기업이 부담하도록 하는 조치들도 생길 것이다. 아무튼 평균적으로 세금 부담이 높아지는 추세를 피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한국호는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갈지 모른다. 하지만 기존의 기업들은 떠날 것이며 돈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저것 부담해야 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사업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 지향적인 사회가 당면하게 될 전형적인 문제들을 한국 사회는 떠안게 될 것이다.

 

번영은 시대정신에 달려 있다.

자조와 자립자존의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는 번영을 구가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계획하고 도전하며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대는 대단한 성장과 발전을 이룬다.

반면 성공은 자신의 공이지만,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구조 탓이라고 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대가 있다. 그들은 때로 ‘속죄양’의 범주에 가진 자들, 많이 배운 자들, 기업가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실업과 해고, 시장 개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기에 앞서 실체가 모호한 신자유주의에만 책임을 돌린다. 툭하면 이런저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정부를 비난하기 쉽다.

아버지 세대를 생각 때만다 나는 가슴이 ‘저며오곤 한다. 배움도 짧고 가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며, 실천을 통해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누구의 도움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 하에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하며, 공리공론을 일삼고 말만 앞서는 사람들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철학이기도 하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뭄부림쳤던 아버지 세대가 주류였던 시대엔 대다수의 성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전쟁터에도 나가고, 열사의 사우디에도 갔으며, 침침한 갱도에서 지내야 하는 독일에도 갔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왔으며 자유주의를 삶으로 체득해왔다.

산업화 시기 동안 한국 사회에서 분출되었던 자조정신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단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역사에서는 자조와 자립자존의 정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씨들을 위한 왕조였다. 백성은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져 있는데 양반들은 실생활과 관련 없는 주자학으로 소일하던 시대였다. 특히 조선조 말기는 지식인이건 민중이건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과 체념에 빠져 있던 시대였다.

 

서울대 폐지론의 함정

시대정신이란 면에서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입으로는 자율과 개방, 경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평등과 나눠 먹기가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이미 끊임없는 적응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에 걸맞는 생활철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수가 아닌 듯하다.

끊임없는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떤 업종이건 예외가 없다. 하지만 몰락하는 산업의 운명에서 자신만은 예외로 간주해 달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특히 수적으로 많은 경우 언제든지 집단을 구성해 시위를 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상응하는 혜택을 얻게 된다. 그들이 받는 보조금이란 결국 누군가의 세금일 것이다.

 

개인주의는 없고 이기주의만 남은 현실

인터넷에 접속해 보면,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 사용은 매우 일상적이며, ‘왕따’와 몰매가 성행하고 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떼를 지어 몰려가 욕설을 퍼붓는 일은 또 하나의 폭력이지만 그것은 아무 죄의식 없이 일어나고 있다.

자신을 아끼듯 남을 존중하는 성숙하고 건강한 개인주의는 자기 운명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개인주의는 오늘날과 같이 다양하고 변화무상한 시대에 곡 필요한 생활철학이며, 그런 철학이 시대정신으로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외부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게 된다.

한국에서 건강한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로 살아가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우리는 도로와 항만을 건설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왔지만 본능을 이성으로 깨우치는, 정신적인 도로와 항만 건설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런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두고두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수의 이름으로, 본능에 호소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를 할 만한 인센티브는 거의 없다. 만일 여러분이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면, 이것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돈을 투입할 것이다. 그런 투자는 직접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정책의 옳고 그름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투입할 여력은 거의 없다.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는 일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차분히 읽고, 생각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그런 분위기는 아직 아니다.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믿는 대로 따라가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게다가 보통의 한국인들은 자기주장이 무척 강한 편이고 좀처럼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어떤 권위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근내에 들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흔히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라고 표현이 있지 않은가 타도해야 할 적이나 상대방이 명확하게 되면, 일단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논리도 생산해 낼 수 있다.

 

정치인은 민중주의를 먹고 산다.

나는 앞으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특별히 투자할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리라고 본다. 몰론 그들은 이용이라는 말을 절대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민중주의 앞날에 대한 복거일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일은 겹으로 힘들다. 원래 민중주의란 큰 호소력을 지닌데다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세고 목청이 높은 세대들이 민중주의를 따른다. 반면에, 다수에게 호소력이 큰 민중주의적 접근에 담긴 논리적, 사실적 오류들을 지적하고 민중주의적 처방이 불러올 문제들을 드러내는 일은 보답이 그리 크지 않고, 으레 도덕적 고지를 선점한 민중주의자들로부터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래도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아니, 민중주의의 물살이 거셀수록 그것의 폐해를 줄이려는 노력은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길은 사회문제들에 튼튼한 이론적 바탕을 갖추고 자유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길뿐이다.

 

집단의 권력화를 불허하라.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100년 전의 근로자들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시장이 발달해 일방적인 보호의 대상에 머물지 않아도 될 만큼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상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기업별 노조라고 생각한다.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의 계약이 그다지 미덥지 않다면, 노동조합의 범위는 기업별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 수준 정도면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의 힘을 빌려 해결하고 싶어 하는 근로 환경과 후생복지의 개선에 합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 산업별 노조로 변모해 왔으며, 지금은 산업별 노조를 넘어 최상급 기관이 최상위 노동조합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앞으로 이런 추세를 막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정당 결성에 성공하고, 최근에는 상급 노동단체장들이 원내 진출함으로써 근로자와 사용자 간 권력의 균형추는 노동계 쪽으로 현저하게 기울고 있다.

향후 10년간 최상위 노동단체의 파워는 지금 보다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될 듯하다. 더욱 정치적인 조직으로 변모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공무원과 교원노조의 정치 참여 등 결국은 원하는 바를 성취할 것이다.

아무리 선의를 갖고 출발했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그 단체는 자체의 발전 논리를 갖추게 된다. 근로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이라고 해도 책임져야 할 범위가 확대되면 될 수록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조직으로 변모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 비단 노동단체뿐 아니다. 신문사건, 각종 재단이건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초기의 설립 취지란, 세월과 함께 무력화될 가능성을 늘 갖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도 상급단체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상급단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노동조합은 사회적 약자라 간주되는 근로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때문에 알게 모르게 보통 사람들의 심정적인 동조를 받고 있다. 이런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노동조합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어내는 데 가일층 노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상급단체를 이끄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더욱더 선명한 노선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선명하면 할수록 이후의 행로도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다.

사용자들이나 사용자들을 옹호하는 단체들이 처음에는 무척 반발 하겠지만, 정치 세력화된 상급 노동단체와 그를 지원하는 세력들 때문에 무척 어려운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는 상급 노동 단체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조직이란 설립 취지에 충실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역시 근로자들의 권익 보호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근로자들의 권익 보호를 광의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조동조합은 정치, 사회, 경제의 개혁을 원하는 단체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상급 노동단체들은 이미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조직의 변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익을 추구하는 권력 기관으로 변질된다는 말이다.

피터 드러커 교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특정 단체가 자신의 사명을 광의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운용하기 시작한다면 사회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될지 우려한 바 있다.

 

목적을 벗어나는 순간 위험해진다.

정치세력화에 이미 성공한 상급 노동단체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노동 관련 입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사용자들을 압박할 것이다. 거대장치산업의 경영자들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확대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며, 신규 대형 투자를 통해 비즈니tm를 활성화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사업가에 미치는 효과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20세기 겪었던 대부분의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해외 유학에 돈을 쏟아붓는 한국

부모들은 미래의 희망을 자식의 교육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좀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면 지금의 어떤 어려움도 견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무지개든 파랑새든, 그것이 무엇이건 사람들은 희망을 좇아 살게 되어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희망만 놓지 않는다면 능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교육에 희망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희망보다는 낙담을, 낙관보다는 비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이 변하면 교육도 함께 변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만큼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드물다. 물론 이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며, 다른 시각으로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시각으로 교육문제를 해석하기 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교육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이 내리는 최종 선택, 조기 유학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부유한 일부 계층의 일일 뿐이었으나 이제는 일부 몰지각한 부유층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 몰아붙이기엔 그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

 

교육도 상품이다.

외환위기와 같은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조기 유학의 물꼬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아일랜드부터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익힐 수 있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중국까지,부모들은 전 세계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그 수는 수십만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학비나 생활비 외에 부모와 자녀들이 오고 가며 지출하는 경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조만간 항공사들은 조기 유학에 큰 기대를 걸게 되지 않을까.

교육문제는 더 이상 교육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향후 10년간 교육비는 경상수지의 구조적인 악화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부실한 산업 때문에 어렵사리 번 달러를 교육비로 모두 지출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교육문제는 곧 경제문제가 될 텐데도 국정 운영자들 사이엔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부총리가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육 개방을 말했다가 며칠 후 번복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 부처 소관이 아니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교육 개혁은 관련 부처와 이익단체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테고, 공교육의 개선과 교육 평준화라는 기치 아래 점점 더 많은 재원이 투여될 것이다. 평등 지향적 교육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을 떠나는 아이들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다. 결국 그런 교육의 최대 피해자는 떠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한 이들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제 교육도 하나의 산업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교육 서비스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해야 한다. 차별화와 경쟁, 혁신의 개념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당장 반대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교육이란 특별한 무엇이며, 공교육을 강화해 평등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낡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다음세대 아이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치열한 시장 환경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은 힘겹게 자신이 삶을 꾸려가겠지만, 그런 결과에 책임이 있는 세대들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이다.

교육 평등화는 그 정책이 보호하려는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오히려 가장 큰 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선의로 시작된 정책이라 해도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쉬쉬하며 애써 눈감으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한국의 교육 현실을 간파하고 있다. 한국의 교육이 접한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교육계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공공부문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다.

공공부문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이미 노동부를 중심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환경미화원, 조리종사원, 사무보조원 등 10만여 비정규직 일부를 공무원으로 인정하고, 다른 일부는 자동 계약갱신과 정년제를 보장한다고 한다. 사실상 정규직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낮은 처우를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공공부문의 성장은 고정비 증가를 가져오며 그것은 재정위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걱정하지 않고 있다. 정책 담당자들은 임기를 무사히 넘기기만 하면 될 뿐, 재정 부담은 후임자가 책임질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경쟁의 최일선에 서 있는 기업들은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조직이 살아남은 해법 가운데 하나가 ‘몸집 줄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은 경쟁 압력이 없고, 스스로 벌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지 세상의 변화에 역행하고 있다.

 

가중되는 재정 부담

[고령화 쇼크]의 저자 박동석 씨는 2020년을 전후해 일어날 세대간 갈등을 이렇게 전망한다.

2020년,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65년까지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와 그 이후 197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버스트 세대’ 간 전쟁이 일어난다.

두 세대는 현재 40대와 30대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20년 후쯤 개혁에 실패한 연금이 휘청이기 시작하면서 갈등은 표면화된다. 싸움은 돈을 놓고 시작된다. 노후의 마지막 보루인 연금의 ‘파이(크기)’와 관련된 문제다. 원래 국가가 연금계획을 짤 때는 연금급여액을 후하게 짜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인구의 고령화로 인핸 재정이 바닥을 드러낼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퇴직자들이 받는 연금급여액을 야금야금 깎아나가고 대신 그 아랫세대들이 내는 연금보험료를 높이게 마련이다.

 

주홍글씨가 된 ‘친미주의자’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를 집필한 김봉중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미국은 정적인 나라가 아니라 동적인 나라다. 미국은 만들어지고 있는 나라이지 이미 완성된 나라가 아닌 것이다. 미국이 특별했다면 지금까지는 이 동적인 전통이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지켜져 왔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프런티어 정신, 지역간 갈등, 다문화주의...... 이 모든 영역에서 미국이 동적이며 만들어져 가는 나라임을 믿는 쪽이 미국은 정적이며 완성된 나라라고 믿고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보다 우세했다. 그러한 전통을 미국의 특별함으로 믿고 그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미국을 가장 미국답게 만들며 미국을 특별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미국인의 특별의식 혹은 선민의식이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던 주요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있는 그대로의 미국을 바라보자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분위기다.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친미’로 낙인찍히게 되어 좋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이해하기를 원하는 지식인이나 정치인조차 ‘친미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을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매도용으로 쓰이는 이 용어 앞에서는 다들 알아서 입 조심하게 될 것이다.

 

대미관계, 실용주의로 풀자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군 주둔은 구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고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중국은 미국과 긴밀한 이해관계를 가진 ’동반국가‘로 변모했다.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이 지역의 위협 세력이 아닐뿐더러 미국에 종속적인 ’의존국가‘로 전락했다. 일본의 위치도 중국, 러시아와 삼각관계를 도모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미군의 한국 주둔 필요성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는 요소가 이처럼 변한 상황에서 미국은 미국이 싫다는 한국을 굳이 버퍼(환충장치)로 삼을 이유가 없다.

한반도에서 미국은 한국 대신 북한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을는지 모른다. 이제 미국을 배척하면서도 미국이 한국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모순된 심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반미이고 경제는 친미‘인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 이상 민족은 없다.

민족주의자는 언제나 좋은 말이다. 민족은 좋은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다. 민족은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다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일제에 의해 처형된 민족주의자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다. 왜 민족주의자는 좋은 의미로 쓰이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주의자라는 말 앞에 ‘박해받는 약소한 민족을 위해 싸우는’ 따위의 수식어가 있기 때문이다.

박해받는 약소민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 박해하는 강대한 민족은 누구인가. 우리의 근대에서 초반에는 일본이었고 이제는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과 싸운 민족주의자는 선인이고 반미를 외치는 민족주의자는 진보가 되는 것이다.

 

세금을 늘리는 일만이 능사인가

대다수는 이제 사회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낳는 생산적 투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외자계 은행들은 이미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자금을 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을 발전시키고 있다. 날로 예대마진이 줄어 새로운 수익원 창출이 필요한 은행의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이 없는 이같은 모델이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유사한 모델은 국내 은행뿐 아니라 다른 기관들로도 확대될 전망이다. 국내의 자금운용 기관은 투명성이나 익명성 보호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홍콩이나 기타 지역의 국제적 펀드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국경을 넘어서는 단기자금 투자의 대열에 한국인들은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이다. 게다가 여유자금 운영에 갖가지 규제가 따르고 자본 이득에 대한 과세가 속속 도입되면서, 일부 부유층에서 시작된 국외 투자는 여유 있는 중산층까지 확산될 전망이다.

아무리 도덕적 의무에 호소한다 해도 자산가들은 적극적으로 자금의 해외 이전을 추진할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198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있었다. 1981년 미테랑의 사회당 집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 최초의 좌파 정부를 성립시켰는데, 사회당의 피에르 모로와 수상과 니꼴 께스치오 사회연대성 장관은 모든 정책에서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재산을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고 해외 투자가들은 프랑스를 기피했다. 이같은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집권 초기의 시도들은 거의 중단되었다.

 

이 시대의 최대 가치는 효율이다.

세계화는 효율성 지상주의를 뜻한다. 모든 것이 효율성으로 평가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경이나 민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경제의 논리, 자본의 논리, 이윤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그런 시대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긴 어렵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세계화의 추세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마치 봇물 터지듯, 모든 분야가 시장의 세계로 흡수되고 통합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겠지만, 사람들은 익숙한 세계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만은 예외라고 막연히 기대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볼 때마다 딱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계화, 너무도 빠르고 너무도 두려운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고, 혁신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지구의 또 다른 곳에서 누구든지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급변한다고 불평하고 저주해도 그것은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변화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함께 모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고함도 치면 동지애를 굳히거나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자본과 세계시장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감성으로 맞는다면, 모든 사람을 동질화시키고 모든 것을 표준화해 버리는 세계화란 타도해야 할 제국주의의 음모로밖에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이성을 앞서게 마련이다. 변화에 동참해 과거를 체계적으로 폐기하고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들은 외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살아 숨쉬는 현장을 온몸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 세계경제란 변신과 적응 그 자체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다수는 그런 체험을 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직시할 별다른 인센티브도 없다.

변화를 주도하는 소수와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다수의 갈등과 반목은 계속될 것이다. 다수는 불안한 자기 처지의 원인을 스스로가 아니라 외부와 타인에게서 찾게 될 것이다. 이처럼 불안한 정서에 호소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세력도 있을 것이다.

쌀 개방도 이 가운데 한 가지이다. 오래 전부터 한국 농업의 구조전환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정치적 위험을 부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가 걸린 다수의 사람들 역시 닥쳐올 미래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눈길을 주었다. 사양화가 불가피한 분야에 엄청난 재원을 쏟게 되었고 그것은 오히려 농가 부채의 증가로 이어졌다.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약62조 원의 예산이 농촌의 구조개선 사업에 투자되었다. 엄청난 돈이 투자되었지만 농가 소득의 증가는 정체되고 빚은 여전히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1993년에 농가당 평균 부채는 682만 8,000원이었지만, 2003년의 부채 규모는 2,697만 1,000원으로 거의 4배가 증가했다. 당분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본 농민들의 경우 소득의 농업 의존도는 14.5%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40.8%에 달한다.

세계화의 파도는 아직 밀려오지도 않았다. 본격적인 쌀 개방은 중국 쌀이 들어오는 2005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동북 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의 쌀은 중국에서도 미질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쌀 시장이 추가로 개방되면 미질이 뛰어난 중국 쌀이 수입시장의 60~7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동북 3성의 논 면적은 우리나라 전체 논 면적(100만ha)의 2배가 넘는 216만 ha에 달해 공급 능력도 엄청나다. 가격도 최소한 30% 이상 싸게 공급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보호되었던 거의 전 영역이 개방에 노출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변화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인다. 경쟁이란 개방과 경쟁 속에서만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필요한 변화를 추진한다. 반면 우둔한 사람들은 애써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믿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믿든지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바꿀 수 없다면 적응해야 한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토머스 프리드만은 세계화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의 상태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이제 존재하는 것은 ‘빠른 세상’과 ‘느린 세상’뿐이다. 빠른 세상은 넓게 펼쳐진 열린 평원의 세계요. 느린 세상은 뒤처진 사람들 또는 의도적으로 평원에서 떨어져 살려는 사람들의 세계다. 느린 세상의 사람들은 빠른 세상이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두렵고, 너무나 동질화될 것을 요구하고, 너무나 많은 능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떤 인위적인 장벽이라도 쳐서 그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비효율적 기업들이 신속히 파괴되도록 하고, 비전 없는 사업에 묶여 있던 돈이 더 혁신적인 사업으로 자유로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나라들만이 번성한다. 반면 비효율적 기업들이 창조적 파괴 대상이 되지 않도록 권력의 힘을 빌려 보호하는 나라들은 시대의 낙오자가 될 뿐이다.

 

무섭게 추격해 오는 중국

한국도 핵심기술을 갖고 적극적으로 중국 기업들을 찾아나서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 근로자들이 중동에 나가 외화 벌이를 했듯이,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들이 중국을 찾게 될 것이다. 특히 기업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은 임직원들은 중국에서 더욱 환영받을 테고, 직장인들 사이엔 영어 대신 중국어 학습 붐이 일어날 것이다. 중국 역시 한국 인재들을 스카우트해 가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그뿐인가. 중국은 급속히 축적된 자본을 갖고 한국의 내수시장에 뛰어들 것이다. 일정한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한국의 유망한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들을 매수할 것이다. 핵심기술을 보유한 한국의 기업 목록을 들고 와 기업을 인수하는 광경을 보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고민하는 기업들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중국의 매수, 합병에 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러한 사태에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계속 낭비할 것이다. 중국이 거의 전 품목에서 자기완결형 구조를 갖추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 고실업과 내수의 잠식이란 격랑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어도, 지난 10년을 후회할 뿐, 때는 이미 늦은 상태일 것이다.

 

중화 민족주의의 부활

미국과 중국의 21세기 아시아 패권 쟁탈전을 다룬 책 [홍군 vs 청군]의 저자 이장훈 씨는 이렇게 전망하고 있다.

중화의 부활은 한반도를 다시 국제 정세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갈 수 있다. 한반도는 이미 중국의 영향권에 상당히 빠져들고 있다. 중국은 북한 핵문제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얻어내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의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북한 체제의 적당한 유지가 필요하다.

한국에게 중국의 북한 카드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해 왔다. 한국은 미국과 안보 동맹을 맺은 국가이지만 북한의 남침 저지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에 더욱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또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이 되었으며, 한국 기업들은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등 대규모 투자까지 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이용해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의 영향권에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의 맹방이었던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으며 인계철선이 되어온 주한 미군도 후방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전쟁 때 북한을 지원한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미를 외치는 소리는 커지고 있으나 반중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반도 국가인 한국이 한쪽에 치우친다는 것은 오히려 화를 자초할 위험이 있다. 만약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놓고 다툰다면 한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은 지금부터라도 양국의 전략을 분석하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좌향좌로 가는 한국, 저 나라가 왜 저러지

10년 안에 사회주의 이념을 이땅에 구현하는 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정당들은 더 많은 유권자의 호응을 얻게 되고, 원내외에서의 발언권은 커질 것이다.

반 시장 심리가 유행하고, 이를 정책화하는 일이 발생하면 돈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저성장과 고실업은 구조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잡고, 한국 사회는 세계인들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초근목피의 가난에서 벗어나 눈부신 고도성장을 거친 다음, 사회주의 색채를 띠게 된 날.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할 것이다. “저 나라가 왜 저러지”

 

좌와 우, 그 기로에 선 한국

평등주의 ;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조선 시대의 신분 질서가 급격히 무너진 탓도 있으며, 해방 후 사회의 지배층이 도덕적 지배력을 배양하는 데 실패한 이유도 있다. 한국의 평등주의는 가히 세계적이다. 멕시코와 브라질처럼 집주인과 파출부가 별도로 타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가는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하기 전에 배가 먼저 아프다. 그래서 못사는 사람, 실패한 사람도 언제나 ‘할 수 있다’는 신념에 가득 차 있다. 발전의 성공은 모종의 비합리적 수단을 동원한 결과라고 믿는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존경의 철회’가 이처럼 강한 사회도 없다.

의사 사회주의 : 평등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이 마음의 행로는 보상 기준과 자원 분배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원 분배의 최선의 기준은 업적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능력과 업적을 적용하면 조직은 금방 내분에 휩싸인다. 특혜란 리더십이 가장 멀리해야 할 관리 방식이다. 어지간해서 인센티브 시스템은 도입되기 어렵다. 의사 사회주의는 대단지 형태로 대량의 동일 평형을 짓는 아파트 건축 방식에서부터 한 번의 수능시험으로 대학을 결정하는 학력 위주의 대입제도에 이르기까지 생활 영역 곳곳에 스며들었다.

10년 후 한국은 기로에 선 채 보다 왼쪽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좌향좌는 ‘가난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까지 왼쪽을 선택했던 사회 중 성공한 사례는 없다. 사회가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할 때 우리는 평등은커녕 자유조차 잃어버릴 수 있다. 아무리 엄청난 행운이 함께 한다 해도 좌향좌의 사회는 결코 번영할 수 없다.

 

의욕 상실의 경제

향후 10년간 노동단체들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겠지만, 모든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는 이미 쇠락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다. 어떤 단체든 초기의 설립 이념을 벗어나 특권을 갖기 시작하면, 그 영향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때가지, 경쟁이 없는 독점적인 단체들은 자신의 논리를 밀어붙이게 된다. 실력행사로 새로운 권리를 얻는 데 익숙해진 이익단체들은 저마다 특혜를 요구하고, 모든 요구가 관철될 수는 없기 때문에 파업이나 데모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정치적 계산이 빠른 이익단체들의 수뇌부는 수의 힘을 비중 있게 다루며 ‘밀어붙일 수 있을 때까지 확실히 밀어붙일’것이다. 시간을 두고 나타날 파급 효과는 그들이 자리를 떠난 후의 이야기일 뿐이다.

경제의 쇠락과 실업 증가가 예상되지만 한국은 철 지난 이념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실업이란 단순히 생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업은 인간의 존엄성까지 빼앗아가는 심각한 사태이다. 전 세계가 실용과 이익, 효율로 달려가는 시대에 유독 한국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할 진보 논리를 부여잡고 있다. 진보 논리에 근거한 정책들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어디 있는가

한국 경제의 기반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경제의 역동성은 눈에 뛰게 떨어질 것이다. 정치 시즌이 올 때마다, 정치인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거듭 약속할 테지만 그것은 ‘립 서비스’에 머물 뿐이다. 그들은 생업의 현장에 선 사람들만큼 절박하거나 절실하지도 않고,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스로의 생존문제가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매사를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가들이 사업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한 과거와 같은 활발한 설비 투자는 아련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신규 투자가 지속되고 성장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던 한국의 주요 공단들은 노후화되고, 그것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후한 공단의 풍경은 재투자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가르쳐주는 좋은 교실 역할을 할 것이다.

대신 기업의 해외 진출은 활발해질 것이다. 소극적이었던 기업들까지 세계 곳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하나둘 해외에서의 성공 경험을 축적한 사업가들은 ‘내가 왜 한국에서 사업을 했을까’라고 자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면 인도 같은 신흥 투자국을 발굴해 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투자는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크게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사례가 중요한 기준이 될 텐데, 다국적기업들은 제조업 분야의 신규 진출을 꺼리고 대신 중국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금융업에서 외국자본 유치는 현재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의 증시에서 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0~50% 정도이고, 수익률 면에서도 한국은 당분간 괜찮은 곳으로 분류될 전망이다. 다만 외자의 유입은 다른 지역과의 상대적인 수익률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것은 정치, 사회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증시의 변동 폭이 확대되고 그것이 경제 불안정을 불러올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또한 10년 후 한국에서는 전경련이나 경총 같은 단체 대신 다국적 기업들이 일본과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조직한 사용자단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한국의 기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에 끊임없이 의견을 제시할 테고, 한국의 사용자들은 아마도 경총이나 전경련보다는 그들의 활동에 더욱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사회주의화를 막을 수 있는 힘이 내부에서 나오기는 어렵다. 놀랍게도 한국의 좌향좌를 막는 커다란 힘은 바로 외국인 투자가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론,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도 다수 한국인들을 깨우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 내의 좌향좌에 대항하게 될 세력은 한국의 사업가들이나 단체들이 아니라 다국적 신용평가사나 해외 기관투자가들 그리고 한국에 직접 투자하고 있는 외국의 기업들이다. 그들은 신용평가나 증시에 투자되는 자금의 입출금을 조절하면서 한국 정부나 각종 단체들에게 균형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불량품을 양성하는 학교

교육의 폐해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은 노동시장에 처음 진출하는 젊은이들이 될 것이다.

교육 제도 개선을 두고 숱한 논쟁을 거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결과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교육은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불량품’을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사실에 분노할 즈음, 젊은이들은 이미 구니한 날들을 낭비했음을 깨닫게 될 거서이다.

경쟁이 없으면 개선이나 혁신도 없다. 경쟁 압력에서 보호받는 우리의 교육산업은 한국의 미래에 오랫동안 부담을 주게 될 것 같다. 학부모들은 교육문제가 자신의 이익과 직접 관련이 있으며 평등 지향적 교육이 폐해가 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한 자식들이 교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기약 없는 실업의 대열에 서는 상황이란 그야말로 끔찍하다.

관련부처는 교육부문 예산을 늘리고 교원을 확충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교육도 산업이라는 마인드가 없고 기존의 이익을 지키려는 단체들이 버티고 있는 한, 본질적인 문제 해결로 교육의 질을 높이기는 어려울 듯하다.

부모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경제적인 압박에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유학비 증가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때문에 급기야는 정부가 유학 금지 같은 특단의 조치까지 생각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몰락하는 중산층, 증가하는 빈곤층

10년 후, 한국 중산층은 지금보다 생활수준이 낮아질 것이다. 고용 수준은 점점 낮아지고 안정성 역시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직장을 잃은 40대 중산층들은 다신 직업을 얻기 힘들 전망이며 가장의 실직으로 인한 우울한 가족의 이야기는 끝없이 생산될 듯 싶다.

그러므로 가장의 근로소득에만 의존하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득을 다원화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 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2~3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에 국한되어 있지만, 앞으로는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공적인 사례도 등장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기를 당하는 등 피해 사례도 나타날 것이다. 특히 봉급생활자들은 강해지는 노동 강도에 비해 서서히 낮아지는 실질임금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세금과 준조세 부담액이 높아지는 추세에서도, 봉급생활자들은 좀더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업과 저성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재정 수요를 만족시키려면 고액 소득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과세는 고액 소득자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서서히 확대될 것이다. 고액 소득자들은 세무 전문가를 이용해 어떻게든 절세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산층은 고스란히 그 비용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출산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미래를 낙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아무리 출산을 장려하고 보조금을 내놓는다 해도 중산층은 이 땅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희망을 거는 대신 현상유지에 만족하거나 이미 같은 탈출을 꿈꿀 것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출산을 기피할 가능성은 더욱 높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이미 큰 부를 축적했거나 고액의 근로소득을 올릴 수 있는 프로페셔널들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를 보며 언짢아할 때도 있겠지만, 충분한 돈이 있는 그들은 추가적인 부를 창출하는 데 골몰할 테고 투자 수익률이 높은 곳을 찾아 국내외를 돌아다닐 것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처럼 그들은 더욱 높은 소득을 거두고 행정부는 수백 조를 웃도는 여유자금이 투기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가진 자들이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거두어들이면서 자발적인 기부나 자선은 정체를 면치 못할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이룬 부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이 소수가 됨으로써, 가진 자들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욱 신뢰를 잃을 것이다. 차라리 외국인이라면 서로 개기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피부, 같은 언어, 같은 역사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빈부격차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진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간격은 더욱 벌어질 것이다.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면 계층간 이동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그러나 저성장 하에서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생긴다. 집단적인 질투와 시기심은 때로는 폭력의 모습으로, 때로는 차별 입법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가진 사람들에게 불리한 다양한 차별 입법은 다수의 무산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본격화될 것이다. 이런 추세가 진행되면서 여유 있는 계층을 중심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는 움직임도 일어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말 못할 분노와 섭섭함을 느낀 계층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심리적으로 이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왜. 이런 공동체에 기여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난은 그 무엇보다 큰 죄악이다. 가난은 자존심을 잃게 하고, 사람을 공포와 비굴함으로 몰아넣는다. 개인의 선택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집단적 선택에 의해 사회 전체가 가난에 처한다면 분명 억울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든 빈곤으로 가는 길을 피해야 하는데, 현재로서 그 물꼬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면 사람들은 여유를 갖는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면 훨씬 과격해지게 마련이다. 실직이나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이라면, 전후 사정을 찬찬히 따지기 힘들 것이며 설령 따진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보다 외부나 타인에게서 찾으려 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단체들을 만들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이 있고, 결국은 사회의 안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정책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일들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반면 중.장기적으로 나타날 부정적인 면을 차분히 설득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비용은 무척 크기 때문이다.

 

사회주의화하는 제도

개인이 가진 지식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때문에 번영을 원하는 사회라면 어떤 방법으로 개인이 지식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할지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시장경제와 이를 받쳐주고 있는 자유주의가 다른 체제와 이념보다 활력적이며 높은 관심을 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개개인의 지식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려면 물론 개인의 자유를 가능한 많이 허용해야 한다. 자유주의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하며 사회적 강제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이 져야 할 책임도 명백하게 자신의 행위라는 범주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작은 정부.법의 지배.규제 완화.민영화 등으로 대표되는 정책들은 자유주의를 구현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이같은 정책들은 일부에서 주장하듯 자본가나 기득권을 쥔 특정 계층이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해 추진하는 음모가 아니다. 부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자유주의 원리를 실천해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창조성의 동력, 시장경제

부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자원에 인간의 재능과 지식을 더할 때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재능이란 치열한 경재의 과정을 통해서 발견되고 발전된다. 나태함 속에서는 자신이 무슨 재능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마련이다.

시장경제를 통해 생계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직장인이건 사업가이건 그는 자신의 특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람과 교환하면서 살아간다.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가격과 품질 등 여러 면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경쟁과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혁신과 개선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긴장을 갖고 치열하게 생활하는 속에서 개인의 창조성은 빛을 발하게 된다.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소극적 자세와 유유자적한 태도에서는 발견과 발명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끈질기게 노력할 때라야 비로소 기대를 걸 수 있다. 혁신과 개선은 인간의 사고력이 집중적으로 발휘될 때 이루어진다.

또한 창조성은 개인의 자유에서 나온다. 자유주의는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개인이 성공과 실패를 확실히 보상하는 것을 선호한다.

반면 간섭주의는 집단적 선택과 사회적 책임을 우선하고 평등에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 결과 평등과 정의라는 이름 하에 계획과 통제를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계획과 통제 속에서 인간의 삶은 수동적이 되고 여기서 창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 함께 책임지는 사회에서는 가능하다면 무임승차하기를 바라게 되고 발명과 혁신은 요원해진다. 그만큼 사회는 정체를 면할 수 없다.

반도체.철강.조선.LCD 같은 분야에선 세계적인 품목이 등장하는데 교육과 같은 서비스업은 날로 낙후되고 잇는 이유는 한국이 과연 시장경제 원리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주의가 곳곳에 뿌리 내린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것은 무엇보다 개개인이 긍지를 갖고 자신을 개발해 나가기 때문이며 사회 전체가 그런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건실한 개인주의가 있기에 정부 간섭주의나 집단주의에 비해 자유주의는 월등히 우세하다. 미국과 구소련. 중국 등에서 오랜 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창의력의 원천’의 저자 박제광 씨는 이렇게 말한다.

창의력이란 곧 새로움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인류 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방향을 제시하고,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입니다. 컴퓨터나 정보산업, 생물공학, 우주정거장 등 21세기 시장의 흐름을 좌우할 분야가 창의력의 소산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 경제가 활기를 잃지 않는 것은 이러한 분야의 발전에 기인합니다. 미국이 21세기 시장경제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된 것의 원천이 바로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각자의 창의력을 발휘해 미국의 경쟁력을 높여주었고 미국의 21세기 리더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의력의 원천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미국인들이 지신 창의성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개인주의에 뿌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 단순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주의란 개인이 삶의 중심, 또는 행동이나 사고의 기준을 사회나 국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에 두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개성을 존중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철학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여기서 개성의 존중이란 곧 다양성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토착화되지 않으면 인간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게 되는데, 개성이 육성되지 않을 경우 개인의 잠재적인 창의력이 개발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창의력이 도태된 사회는 21세기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협받는 자유시장경제

이상사회 구현이라는 높은 꿈을 좇기보다는 구체적인 악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수리해야 할 부분을 정의하고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사회 구석구석을 고쳐나가면 된다. 그러나 이렇듯 당연한 말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원시 본능의 부활

자유시장경제는 인류 역사상 극히 짧은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에 비유하면 시장경제는 불과 3분을 차지할 뿐이다. 나머지 23시간 57분 동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해 온 것이다. 바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나누어 갖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체제에서 자원 배분을 담당하는 사람은 국왕이나 부족장, 혹은 전제군주였다. 필자와 김정호 박사가 공동으로 집필한 ‘갈등하는 본능’의 내용을 인용한다.

인류의 진화 역사를 24시간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전의 시대는 마지막 3분에 불과하다. 그 3분은 너무나 짧다. 23시간 57분 동안 난공불락으로 만들어져버린 유전자구조가 현대의 3분 동안에 바뀔 수는 없다. 구석기의 인류와 현대인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변화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원시 시대에 만들어진 본능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원시 본능을 탈피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은 늘 많은 에너지의 소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전반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이 그토록 바르게 대중들의 마음속을 파고들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는 바로 특별한 배움이나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더욱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체제가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라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화려하게 포장된 사회주의 정책들은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고 갈채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정부 개입주의의 뿌리에는 제3의 특별한 현자가 존재하고 그의 계획이나 지시 혹은 명령에 의해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깊은 믿음이 존재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진화를 멈춘 지는 오래되었다. 인간이 새로운 제도와 관습 그리고 관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화적 진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성의 힘이 부족하고 감성에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원시 본능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문명화된 나라라 하더라도 역사의 어느 기간은 사회주의화를 실험할 때가 있다. 바로 원시 본능이 집단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때이다. 시장경제와 관련된 지적 인프라가 척박한 이땅에서 우리는 원시 본능의 화려한 부활을 목격하고 있다.

 

실리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뿌리 깊은 전통

자본주의 실사구시를 중시하기 때문에 실용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반면 사회주의는 명분과 함께한다.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직접 행동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행동보다는 토론이나 담론을 즐기는 편이다.

한국인은 본래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 실용을 중시했을까. 명분을 중시했을까. 조선 시대의 한국인이 우리 모습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 모습에서 어느 정도 추축해 볼 수는 있다.

원산지 중국과 수입국 한국이 주자학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자. 조선은 민생과 상관없는 제사와 기일 따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한국인의 원형에 부합하기 때문에 주자학이 승했던 것은 아닐까. 주자학에 의해 조선은 더욱 화려한 명분을 꽃피울 수 있었다.

중국인의 상술을 쓴 강효백 교수는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를 최고의 사표로 삼으며 주자가훈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는 안후이 상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안후이 상인들 가운데 사업가로 큰 족적을 남기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강효백 교수에 의하면, 안후이 상인들은 눈부시게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급속히 몰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자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설명인데, 장사를 잘해 돈을 많이 벌어 잘살기 바라는 대다수 중국 상인들에 비해 안후이 상인들은 중국 내에서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상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안후이 상인은 주자학의 종법주의와 소농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돈을 조금 벌면 만족하고, 더 이상 재투자를 하려 하지 않는다.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하지 않는 것을 마치 상도와 상덕으로 여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거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 한쪽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자기비하와 자기학대 의식이 웅크리고 있다.

안후이 상인은 돈깨나 모았다고 생각되면 곧장 부나방처럼 관직의 길로 나섰다. 이웃 저장이나 광등 상인들처럼 상업만을 인생의 유일한 생업으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번 돈으로 관직을 사든지 의연금이나 기부금을 많이 바쳐 조정의 환심을 사는 데 몰두 했다.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과 중국의 안후이 상인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최고의 경지를 향해 LANRANRGL 나아가는 일은 충분히 갑지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업에 일가를 이루거나 조금만 이름이 알려지면 바로 정치행을 택한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기보다는 ‘감 놔라. 배 놔라’를 외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인T다.

주자학은 여전히 한국인의 의식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천보다 말이 무성하고,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쿠바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났지만, 그보다 훨씬 발전된 교조주의와 명분주의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북한을 봐도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은 ‘백범 일지’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500년 조선은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뿐이요. 주자학으로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 민족의 원기를 소진해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 사움과 의뢰심뿐이다.

오늘날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아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빈약한 개인주의의 전통

조직에서 상사와 부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계약관계에 있다. 부하란 봉건군주 시대의 신하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상사의 영향력은 업무와 관련된 범위에 제한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사나 선배가 부하와 후배의 사적 영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삶을 통해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다.

피터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에서 이에 대해 명쾌하게 지적했다.

종업원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으며, 정당화될 수도 없다. 조직과 그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법률상 다른 어떤 계약보다도 협의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고용계약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과 그 구성원 사이에 애정. 감사. 우정. 경의. 신뢰 등이 없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가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며, 또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세상은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자체의 논리나 규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든지 과거로 돌아가 가난하게 살든지 두 가진 선택이 있을 뿐이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사람들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한국은 스스로 더욱 매력적인 장소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기업이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듯이 국가도 하나의 생산단위로서 국제자본이라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제자본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허심탄회하게 답을 찾아보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컨설팅을 받을 필요는 없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이고, 여간해서 돈을 벌 수 없다면, 자본은 한국을 떠날 것이다.

구한말 위정척사를 외치는 것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을 구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시대의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위기의식 없는 위기

역사상 우리는 미래에 대한 준비가 늘 부족했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렸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들의 심성에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차곡차곡 쌓여왔다. 강국이나 대국에 관련된 사안에서는 쉽게 넘겨버릴 수 있는 문제들조차 민감하게 반응하고, 우리들 스스로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한 채 에너지를 낭비해 버리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미래를 전망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공동체 차원의 절박함이나 절실함이 부족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자연히 위기감을 공유하고 더 열심히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일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현재의 위기에 대해 논의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며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들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국난이 발생하고 난 후에야 수습하는 일들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구호에 현혹되지 말라

잘살고 싶으면 보편적인 규칙을 따라야 한다.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현 시대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아울러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를 더욱 확고하게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한다. 물론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다. 체제가 가진 단점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심리를 부채질하는 선동가들도 등장할 것이다. 선동가들이란 선동 자체가 자신의 존립 이유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냉철하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이 많고 막연한 낙관도 강한 편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세계의 돈을 누가 갖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사상에 투자하라

하이에크와 함께 자유주의의 탁월한 선각자로 불리는 미제스는 시민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적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적 투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공동체가 모두 나누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제스가 살던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지적 투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면, 이민이라는 선택을 하면 된다. 과거에 비해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한결 넓어진 셈이다. 대문에 사상에 대한 투자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기업가정신을 진작하라

부는 말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누군가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과 의지를 가져야 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공동체든 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의욕을 북돋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기업가의 의욕은 세금 제도나 각종 규제와도 연관이 깊지만 사회적 평판이나 대우도 무척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기업가정신은 보편적이고 예측 가능한 법이 객관적인 잣대에 의해 적용될 때 유지될 수 있다. 정치가나 관료들의 자의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판단이나 명령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기업가정신이 진작될 수 없다.

노동자의 대우가 향상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일자리를 늘리는 사람이 없으면 헛된 일이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노동자의 처우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고, 기업가정신이 얼마나 희소하고 귀한 자원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관용과 개방성을 유지하라.

관용의 또다른 표현은 개방이다. 이것은 시장의 개방뿐아니라 의식의 개방을 뜻한다.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것이다. 개방이 있기 때문에 여러 다른 종류의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고,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다. 창의성이란 순혈주의에서는 탄생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이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개방과 관용이 창의성의 원천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관용은 창의성을 꽃피우는 바탕이 된다. 서로 다른 의견과 신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유지하는 일은 한국의 미래에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임직원들 개인의 문제로 연결하라.

우호적이지 않은 사업 환경이 기업 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정치.경제,사회 환경의 변화가 기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임직원들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환경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며, 위기감을 고유하는 별도의 노력을 과거보다 훨씬 열심히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핵심 역량을 확보하라

세계화가 단일시장으로 수렴되는 현상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면, 브랜드 파워를 가진 몇몇 기업이 시장을 차지하고, 그중에서 브랜드 파워가 막강한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브랜드를 갖고 있는가.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경쟁자들을 따돌릴 만한 생산기술을 갖고 있는가.

 

시장의 규칙을 기업에 적용하라

많은 기업들이 시장과 조직, 개인의 변화 속도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점점 빨라지는 시장과 고객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는 업종과 규모를 불문하고 기업들이 당면하는 곤혹스러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원칙만 실천할 수 있다면 기업은 크게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의 경계를 과감히 허무는 일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즉 시장의 규칙이 기업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임직원들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조직을 설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컨설턴트인 스탠 데이비스는 ‘미래의 부’라는 책에서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안쪽의 변화 속도가 바깥쪽의 변화 속도만큼 빨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활동이 외적인 시장 규칙에 의해 운영되도록 조직의 경계선을 열어야 한다. 조직은 관료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사의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피하려면 기업이 결코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분명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유연하고 적응력이 강한 것일 수 있다. 미래로부터의 교훈은 이것이다. 주변부에서 더 많은 힘을 보내고, 한 발 더 나아가 경계선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서 시장의 규칙에 의해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기업의 모든 부서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기업의 특정 부서가 외부에 자신의 서비스를 당당하게 판매할 수 있을 정도로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각각의 부서는 하나의 기업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개개인이 하나의 기업처럼 운영되어야 한다. 그런 목표를 향해 기업은 제도와 관행, 의식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기회를 찾아나서라.

사업 환경이 악화된다고 해서 돈벌이 기회 자체가 적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이고, 이런 와중에서 기업들이 져야 할 위험은 엄청나게 커지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는 곳곳에서 생겨날 것이다. 다수의 기업들이 ‘죽을 쑤고’있는 반면 기회를 포착해서 먼저 움직이는 데 성공한 기업들은 선점의 이익을 톡톡히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사에 관계없이 부를 향한 게임은 더욱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분위기의 우울함을 뛰어넘어, 기회를 찾아서 부지런히 뛰어다니기를 권하고 싶다.

 

바꿀 수 없다면 적응하라.

세계경제는 끊임없는 적응 시스템이다. 국가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환경의 변하에 맞추어서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야 한다. 누구도 그런 변화로부터 성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고 현재를 밑천으로 미래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 미래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항상 앞날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이나 관습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이에 따른 영광과 책임을 함께 안게 되는 시대를 살아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스스로 인생을 100퍼센트 책임진다는 각오로 행동해야 한다.

기적은 없다.

먹고사는 영역에 기적은 없다. 개인의 삶에는 요행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경제에는 결코 요행이 있을 수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

세상에 완전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나마 자유와 평등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체제는 자유시장경제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왜곡된 체제 밑에서 번영을 누렸던 경우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현명함과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울대의 이지순 교수는 ‘위대한 생각’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반 자유주의자들이 각계에서 득세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불행히도 이와는 거리가 멀며, 정체도 수상한 ‘제3의 길’이 유행인 것을 보면 이 땅에서 자유주의가 꽃을 피우기는 아주 어려운 일인 듯싶다. 밀턴 프리드먼에 의하면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남들의 이익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정부를 좌우하게 되면 평상인의 경제적 복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유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라.

미사여구로 이런저런 정책의 필요성을 외치는 정치가나 행정가들을 볼 때, 그들이 진품인가 위조품인가를 선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런 선별력을 갖게 된다면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우리는 훨씬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법과 제도, 관행이나 관습이 시장경제 원리에 부합하는지를 판별하고 싶다면, 다음의 9가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첫째, 자기 선택의 원리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라. 가능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라. 개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이 현저히 뚜렷하지 않는 한,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라. 그러면 사회적으로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 교환 자유의 원리

개개인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행하는 교환은 부를 낳은 원천이다.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전문화와 분업에 있다. 대규모 사회는 분업과 전문화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교환 이외에 경제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셋째, 사적 재산권의 원리

사적 재산권이 보장되진 않느다면 자발적인 분업과 교환은 이루어질 수 없고, 결과적으로 한 사회는 부의 감소와 성장의 지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떠한 선의나 명분에 의해서건 사적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의도는 억제되어야 한다. 재산권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혁신과 개선은 일어날 수 없다.

넷째, 기업의 자유 원리

현대 사회에서, 부는 원자적으로 흩어져 있는 개개인보다는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직을 만들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허용하라. 기업 자유의 원리는 기존기업들의 이익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경쟁의 원리

시장경제가 계획경제에 비해 월등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부가가치란 인간의 지적 능력이 발휘될 때 창출되는데, 인간의 지적 능력은 경쟁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발휘될 수 없다. 경쟁은 발견적 절차이다. 인간의 숨은 재능은 경쟁 압력이 존재할 때 하나 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섯째, 인센티브의 원리

‘연대’를 즐겨 말하는 지식인들은 인간을 이상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살아 숨쉬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에 무척 충실한 존재이다. 이익에 충실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시장경제 원리의 한 축을 차지한다.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않는 곳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일곱째, 자기 책임의 원리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라. 책임의 중압감을 가질 때 신중하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두의 책임은 어느 누구도 책임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작은 정부의 원리

시장경제는 거대한 정부와 공존할 수 없다. 규모가 커질수록 정부가 좌우할 수 있는 자원의 양도 증가한다. 이 경우 정치 논리를 앞세우며 자신에게 우선적을 자원을 배분해 달라는 사람이나 집단이 늘어나게 된다.

정부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원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정부가 사용하는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정부에 환상 같은 것을 갖고 있지만, 정보는 스스로 선한 일을 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원을 배분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기관일 뿐이다.

한국은 삼권분립이 이루어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로 행정부가 지나치게 큰 힘을 갖고 있다.

아홉째, 법치의 원리

시장경제는 ‘법의 지배’를 따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법의 원리를 어긴 공법들이 행정부 주도 아래 양산되고 있다. 어떤 법은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을 통해 위헌 판결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새로운 도덕률로 무장하라.

과거의 도덕률이 지배하는 한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와 민중주의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덕률이다. 그것은 시장경제에서 살아가는 행동규범이자 번영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덕률이란 어떤 것일가 나는 시장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지지하는 새로운 모럴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첫째, 사적 소유권을 법률이나 관행으로 존중하는 모럴

둘째,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맺어진 계약을 존중하는 모럴

셋째, 모든 교환을 뒷받침하는 정직과 상호 신뢰라는 모럴

넷째, 선택의 자유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모럴

다섯째, 자신과 다른 것을 용인할 수 있는 모럴

여섯째, 경쟁 결과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연이란 요소가 개입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모럴

일곱째, 질투와 시기심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자제시킬 수 있는 법이나,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모럴

여덟째, 앞서가는 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자들을 다수의 힘을 이용해서 억제하거나 무력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금기 사항을 준수하는 모럴

 

성찰을 통해 현명해져라.

데일 카네기, 나폴레온 힐, 브라이언 트레이시 등은 자기계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루는 분야를 흔히 ‘성공학’이라 일컫는데, 성공학의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방법은 실제로 무척 효과가 크다.

3.40대 직장인들이 당면하게 될 미래는 지금도 너무 확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런 미래를 스스로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비난해야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의 도래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비하지 못한 자신이지, 사회의 구조적인 약점이 아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행운이나 불행조차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와 태도는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할 것이다.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버려라.

소규모 사회와 대규모 사회를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집단주의를 후자는 개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대규모 사회가 반드시 개인주의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 러시아나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집단주의는 ‘다 함께’를 강조하는 연대감을 기반으로 하며, 상호 이타심이 모럴이 된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영역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수가 원한다면 혹은 부족이 원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시장 모럴은 자유와 용인 그리고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설령 다수가 원하더라도 소수의 권한을 임의로 침해할 수 없다. 개인은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고, 그것은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는다.

소수에 대한 관용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시장경제에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 이른바 장사꾼이나 기업가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시장에 숨어 있는 교환의 기회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한 사회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창조적 소수이다. 그리고 이들이 발견해 내는 이윤을 존중할 때 시장경제는 더욱 번성할 수 있다.

 

스스로 책임지고 행하라.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정부에 기대려고 한다. 실업에 대해서도, 노후에 대해서도, 재해에 대해서도, 건강에 대해서도 모두 정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한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는 한 정부의 규모는 확장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정부에 맡기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비대한 정부 하에서 번영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들의 책임도 크지만, 결국은 국민들이 알아서 자신의 자유를 정부에 양도한 결과이다.

물론 자유란 두려움을 뜻한다. 미래의 불확실함을 담보로 삶을 개척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두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 길을 거부한다면 결국 ‘노예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수많은 결정을 개개인이 아니라 공권력이 대신 내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기꺼이 가난을 택하겠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좀더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무지 때문에 이용당하지 말라.

모두가 ‘깨어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꼭 우리 당대의 운명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남겨주어야 하는가.

오늘날의 청년 실업은 많은 부분 기성세대가 내린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들어서 한국은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뿌려진 씨앗이 남긴 수확을 마치 곶감 빼먹듯 살아왔다. 일부 기업의 걸출한 성과가 우리의 생활수준을 이 정도 유지하는 데 그나마 도움을 주었지만 8년째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 잠재력을 신장시키는 정치적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한 청년들과 그 이후의 세대는 톡톡히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금의 젊은 세대와 중년층은 본격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또한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나 정부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는 순진함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주거의 시대가 가고, 임대의 시대가 오고 있다’며 더 이상 아파트를 장만할 필요가 없다는 관련부처와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을 믿었던 사람들은 집값 폭등에 엄청난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신용카드를 씁시다’고 은연중 권유하는 광고나 정부정책에 덩달아 행동한 사람들도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무절제하게 카드를 쓴 개인의 책임이 적다는 말은 아니다.

유럽의 뛰어난 투자가였던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책을 읽다가 정부 정책을 너무 믿지 말라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선의에서 나온 정책이라도 결국은 당신의 돈을 낭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것은 무지이다. 모른다는 것은 곧 이용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점이 무척 두렵고 걱정스럽다. 찬찬히 따져보고, 무엇이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아야 한다.

 

홀로 당당히 맞서라

위험이 증가하는 만큼 기회의 진폭도 커지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전망하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국가가 어떤 약속을 하더라도 임기가 끝나고 나면 그만이다.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직업과 노후, 아이들의 교육 등 스스로 부담해야 할 책임의 크기는 더욱 커졌다. 남들이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럭저럭 지낼 만하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다. 교육문제만 해도 그렇다.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준비시켜야 할지 부모는 자신의 관점을 세워야 한다. 과거에 했던 식은 이제 유호기간이 지났다. 교육뿐 아니라 매사가 다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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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눈을 떠라.
참으로 힘든 일이다.
많은 인풋이 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 기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한다.
그날은 금방 찾아온다.
백발의 그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