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경영대전
2004.11.17일
홍하상
1955년 서울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 MBC방송대상 작가상
그이 사업 스타일에는 항상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일단 원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 그리곤 수많은 연구와 사전 점검을 거쳐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것,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일단 마음의 결정을 했으면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4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그의 행보들을 당당히 남겨 놓은 이병철은, 평소에 그가 자주 되뇌었던 명구 한 구절을 그대로 실천하고야 말았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이병철, 그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병철은 한국 근대화 이후 최고의 경영인으로 꼽힌다. 그는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후 1987년까지 48년간 삼성그룹을 경영하면서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놓았다. 오늘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휴대폰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두 가지 주력 수출 상품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도 단연 삼성이다.
중교리 가는길
나는 이병철 회장에 관한 책을 쓰기 전에 그의 고향인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를 먼저 가보고 싶었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이곳 중교리의 대지주라고 했다. ‘풍년에는 2,000석, 흉년이 들어도 1,500석’이라는 말이 이병철의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다.
‘사람을 의심하려면 쓰지 말고, 일단 tM면 의심하지 말라’는 ‘논어’의 한 구절은 이병철이 기업가로서 자주 인용하던 문구였다.
유학 생활을 접은 이유
이병철이 일본 사학의 명문인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지 며칠 후 그는 부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는 것이 아닌가.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을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당시의 300석은 작은 돈이 아니다. 일개 면에서 300석지기 농사꾼이 한 명 내지 두 명이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다. 이병철이 술회하기를 연수 300석은 먹고살기에는 넉넉하나 그렇다고 사업자금으로 쓰기에는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어쨌든 부친으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은 이병철은 그가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한다.
일제 하에서의 고군분투
‘정미 사업을 하자. 그것도 마산에서 가장 큰 규모로’
한 사람이 1만원씩 출자하여 정미소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의 3만원, 더구나 조선인들이 가진 3만원은 무척 큰돈이었다.
정미소가 잘 돌아가면서 이익이 나자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에 착수한다. 마산에 운송수단 즉 트럭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트럭 운임이 비싸니 트럭을 몇 대 사서 쌀을 운송하는 운송회사를 하나 차리고 싶었다. 이병철은 트럭 10대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 소유의 마산 일출자동차 회사를 구입하고 거기에 10대를 더 보태어 도합 20대로 운수회사를 새로 창업했다. 일출자동차는 일본 규슈 오이타현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1975년 9월 17일 전경련에서 있었던 최고경영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실패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해다.
뜻하지 않던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자란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니다불대수장선고’라는 말이 있다. 진흙이란 좋은 흙이 아니며 더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진흙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불상을 만들 수 있다. 물이 늘고 파도가 거칠어지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대신 배는 그만큼 높이 올라앉는다. 떫은 감도 정성스레 잘만 말리면 단감이 된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아지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드는 데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항상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삼성’이란 이름으로
‘못 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말아라. 단, 일단 쓰려고 결정했거든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운(運), 둔(鈍), 근(根)이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어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대륙여행에서 발견한 것
1938년, 그의 나이도 스물아홉이 되었다. 요즘의 스물아홉 나이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지만, 이병철 시대에는 달랐다.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불과 50세 정도밖에 안 되던 시절이므로 정신연령은 지금보다 최소한 10세 이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당시 스물아홉의 이병철은 마흔 살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1900년대 초에 40세 정도의 나이면 이미 노인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며, 조선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종 연간의 조선인 평균수명은 32세였으므로 구한말 30세 정도면 이미 노인이 아니겠는가.
그해 3월1일, 이병철은 무역회사를 세운다. 자본금은 3만원, 상호는 삼성상회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이병철이 회사 이름을 ‘삼성’으로 지은 것은 숫자 3이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숫자 3을 좋아하는 이유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로 인식된다는 것. 즉,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 있는 모든 가구나 기구들은 쓰러지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의 인구는 20만명, 이병철은 대구시 중구 인교동 61-1번지, 즉 서문시장 근처에 삼성상회를 연다.
본래 대구의 사과는 미국인 선교사가 캘리포니아에서 묘목을 가져와 정원수로 심었던 것인데 1905년부터는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재배하였고, 1912년에는 대구와 왜관에 과수재배조합이 서립되면서 유통이 본격화되었다.
사과는 대구 근처에서 사들였다. 오징어와 북어 등 건어물은 포항에서 들여와 만주, 베이징 등지에 보냈다.
을유회 회원들과의 인연
그는 독특한 자신만의 관찰력으로 어떠한 사업이 유망한가를 찾았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청주 제조였다.
마침 일본인 무네이가 경영하던 조선양조라는 회사가 매물로 나왔는데, 이곳 조선양조는 연간 7,000석의 쌀로 청주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구에서 가장 큰 양조장이었다. 조선양조의 경영진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 결국 회사를 팔아버리려고 서두르던 중이었다. 가격은 10만원.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회사의 규모나 실적으로 봐서는 오히려 싼 것이었다.
이병철은 즉각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양조는 당시 허가가 제한되어 있어 허가증만 가지고 있어도 커다란 특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양조장을 사기 위해서는 상당한 웃돈을 얹어주어야 하던 시절인데다. 당시에는 개인이 각자의 집에서 술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양조장의 숫자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당연히 양조장을 인수하기만 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공을 위한 잠시의 칩거
1941년 12월 7일, 중일전쟁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다. 일본 해군 소속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기선제압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함대를 파괴함으로써 미국의 해군력에 타격을 입혀 세계 재패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일본의 전쟁 지휘부는 경제력 면에서 일본이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나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사전에 파괴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시험대에 올랐다. 모든 산업을 군수산업체제로 전환한 후 전면전에 돌입했다. 일본의 모든 산업도 군수산업으로 바뀌었다. ‘1억인 옥쇄’의 각오로 일본은 국운을 건 한판승부를 시작했다. 일본의 병참기기 중의 하나였던 조선의 경제도 군수산업체제로 바뀐다.
이병철이 하고 있는 양조업도 업자의 자유 재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것은 할당량의 5퍼센트로 제한되었고, 나머지 95퍼센트는 모두 군수용으로 전환되었다. 쌀이나 곡물뿐 아니라 포탄을 만들기 위해 모든 쇠붙이가 공출되었고 군대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징발되었다. 솔방울조차 비행기 기름을 짜기 위해 조선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이른바 천왕이 벌인 성전수행의 시대였던 것이다. 모든 물자가 공출되는 바람에 시중에서는 쌀을 구할 수가 없어 일반인들은 쌀 대신 만주에서 수입한 대두박을 먹었다. 대두박은 콩깻묵으로, 이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집안의 먹거리였지만 그 이후에는 낚싯밥으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한국인들은 남태평양의 전쟁터로 혹은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북해도의 탄광으로 강제 연행되어 조선을 떠나갔다. 징용과 징병으로 72만명이 조선에서 끌려나갔지만 정세가 갈수록 급박해지면서 일본의 패색도 짙어졌다. 이병철은 그 3년 동안 그야말로 칩거했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참고 기다린 것이다. 훗날 이병철은 당시 자신의 칩거 생활에 대해 ‘호암어록’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였다. 생략...
1944년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의 전 국토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미국의 b-29는 무차별로 일본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일본 98개 도시에 있는 236만 채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다. 도쿄에도 무려 102번의 공습이 있었는데, 도쿄의 황거도 불길에 휩싸여 대도시의 밤하늘을 벌겋게 물들였다. 1945년 8월 11일, 연합군은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두 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갔다. 히로시마에서는 20만 명이 죽거나 재가 되었고, 나가사키에서도 9만 4천명이 사망했다.
8월 15일 정오, 중대방송이 곧 나온다는 예고가 있었기에 이병철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사람들도 그 시간만큼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라디오를 들을 수 있도록 특별배려가 허용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노인의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일본 천왕 히로히토였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난생 처음 듣는 천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비추어 비상조처로서 시국을 수습하려 하며 여기에 충성스런 여러 국민에 고한다. 나는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하도록 통고하였다.
잡음이 심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공동선언 수락’이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동선언 수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천왕의 방송이 끝나자 온 동네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을 길목마다 태극기가 물결쳤다. 일제 36년의 기나긴 지배 하에서 한국이 독립하던 순간이었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인구 2,000만 명에 국민소득 6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이제 막 재도약을 시작했다.
19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 2층에 ‘삼성물산공사’라는 간판이 걸렸다. 공사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장차 주 거래선이 될 화교상인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신목여전의 기업가
조사 자료의 숫자만 가지고는 가부간의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때 문제되는 것이 곧 최고경영자의 직관력이다. 다만 그 직관은 평소의 치밀한 계획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직관만이 아니라 직관에 따른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결단이다.
1953년 11월 5일의 일이다. 이병철과 임직원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서로 얼싸 안으며, 바로 그날을 제일제당의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제일제당은 당시 삼성그룹이 최초로 시도한 근대적 기업으로서의 첫성공이다.
상도의
한 개인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사회 전체가 가난하다면 그 개인의 부는 보장받지 못합니다. 사업가는 개인의 이익을 취하기에 앞서 사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업을 하면 번영하고, 이득만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망한다.
제당에서 제분으로
1957년 10월 이병철은 제일제당 공장 내에 제분공장을 또 세웠다.
마카오 신사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 이 가난한 나라, 1950년의 한국은 비참했다.
미국 중역의 항복
이병철이 모직공장을 설립한다고 하자 선진국의 모직 전문가들은 비웃었다. 영국의 경우는 모직기술을 축적하는 데 1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고, 영국의 기술을 전수 받은 미국도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려서 비로소 제대로 된 모직 기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모직회사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파이팅 사의 중역은 ‘한국이 자력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내가 하늘을 날아 보이겠다’며 이병철의 포부를 비웃었다.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어떤 사업이건 실패의 위험은 뒤따른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다. 100퍼센트의 자신감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 불안을 품은 채 착수하면 주저하여 전력투구를 못하게 된다. 배수진을 치고 백척간두에서 단호히 결행해도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히거늘, 하물며 출발부터 의심하고 망설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공장 건물 중 가장 먼저 완공된 것이 여직원 기숙사였다.
기업가는 좌절에 익숙해야 한다.
나는 우동과 뚝배기 음식, 그리고 생선초밥을 좋아합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만 있으면 그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정말 재미가 나고 적극적으로 열의를 The습니다. 뭔가를 새로 창조한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아침저녁에도 그 생각, 자고 일어나서도 그 생각, 무언가 부족한 게 없나, 있으면 보강하고 물어보고, 회의를 해서 안 되는 게 있느냐, 또 알아보고 일을 맡기고.... 난 똑같은 일을 하라고 하면 대단히 싫어요.
목적은 오직 하나
1961년의 한국은 국민소득 78달러 이하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오늘날의 인도보다 더 가난했으니 말이다. 농촌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가 없을 정도였고, 하루 세끼 밥을 다 찾아 먹는 사람이 국민의 1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될 때였다. 1963년 필리핀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23달러라고 하자 그것을 매우 부러워할 정도였다.
세 번째 재도전
1963년 10월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정도의 장애에 굴복할 수는 없다. 누가 이기나 어디 두고보자. 이병철은 킬렌의 반대에 오기가 발동했다. 이병철의 골프친구였던 일본의 토고 도시오 도시바 회장의 말 중에 이런 부분이 잇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집념이 모자라서이다.
공장부지는 울산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제3공화국은 울산공업단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하고 있었는데. 이병철은 그 단지 안의 땅 35만 평을 사들였다. 1965년 12월 공장부지의 정지공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비료공장 건설이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명분에 앞서지 말아야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67년 3월 한비는 완공되었다.
이병철과 박정희 사이의 갈등의 주요 원인은 한국비료의 헌납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이병철의 컬러 TV 출하를 박정희가 반대함으로써 이병철은 대통령의 잘못된 지시로 인해 한국의 전자산업이 2,3년 퇴보하게 되었다며 박정희를 원망하기도 했다. 또한 전경련 제2기 회장 선거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이병철이 낙선함으로써 박정희와 이병철의 갈등은 더욱더 골이 깊어졌다.
컬러 TV에 대한 의견 대립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삼성전자는 창립 9년 만인 1978년에 흑백TV 200만 대를 생산하여 일본의 마쓰시다 전기를 앞섰다.
1972년 말 2년여의 공사 끝에 공장은 완공되었다. 1,200명의 종업원들이 우선 선풍기와 흑백 TV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생산 첫 해에 5만 2천대의 흑백 TV를 미국에 수출했다. 이것이 사실상 한국 전자공업의 첫 해외시장 개척이었다.
거제조선소의 출발
1977년 4월 이병철은 결국 문제의 조선소를 인수했다.
어느 기업에나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뒷다리 잡는 직원이 늘 있게 마련이고, 상위 5퍼센트는 지시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지만 하위 5퍼센트는 틈만 나면 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조직의 활력을 위해서 때로는 과감한 인원정리가 필요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삼성이란 이름
우리나라의 석유화학공업은 그 출발지가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이다.
일흔 세살의 모험
그렇다면 이병철이 생각하고 있는 첨단기술산업이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반도체였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 첨단 산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워낙 세밀한 사업이다 보니 그 기술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막대한 자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더구나 그 기술개발의 속도가 무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반도체는 2,3년 주기로 신제품이 쏟아지고 있는데다가, 고급두뇌와 기술인력을 오랫동안 육성해온 미국과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고민에 빠졌다. 고급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 것일까? 또 공장부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그 건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또한 공장설비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이병철은 그때 세삼 자신의 나이를 되돌아보았다. 73세, 고희가 지난 나이다.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나이 아닌가. 반도체는 그런 초로의 이병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업이었으나 그는 다시 한 번 일어서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반도체분야로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또 한 번의 신화
이병철은 삼성반도체팀의 보고서와 그간에 만났던 미국과 일본 전문가들의 의견을 떠올리면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고 어느 새 여명이 밝아왔다. 아침 6시 30분 이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중앙일보 회장인 홍진기였다. 이병철은 홍진기 회장에게 3월 15일을 기하여 삼성이 반도체 및 컴퓨터 산업에 뛰어든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알리라고 통보했다. 이것이 삼성의 반도체 입국선언이었다.
이병철은 1983년 3월 15일 반도체사업의 원년으로 삼았다. 삼성이 개인기업이라는 차원을 떠나 기술의 선진화를 통한 풍요로운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최첨단 반도체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반도체 자체도 수천 종류가 있으므로 그중 이익이 많이 나는 품목을 찾아야 합니다. 이윤이 적은 것은 적게 생산하고, 이윤이 많은 것은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즈니스입니다.
그 당시 이병철의 집념과 반도체사업에 대한 혜안은 오늘날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게 된 원동력이다. 삼성의 사운을 걸고 반도체에 뛰어들었던 이병철은 각종 난관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과 굽힐 줄 모르는 집념,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삼성은 물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최단기간 내에 반석 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룩했다.
사업규모의 경제성 파악을 위한 원칙
1.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2. 확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및 적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3. 동원할 수 있는 기술수준을 알아야 한다.
4. 확보할 수 있는 시장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불모의 현장에서 반도체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이병철이 세운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신규사업은 신중히, 그리고 철저히 계획해야 한다.
사업을 계획할 때 처음은 대부분 낙관적으로 전망하기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이익이 나기로 되어 있는 해에 이익이 나지 않기 일쑤다. 따라서 새로 하는 사업은 사람들도 경험이 없고 경영방법마저 새롭기 때문에 신중하게 따져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먼저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당초에 정한 원칙에 어긋나면 안 된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경우에는 고치고, 또 개선하면서 계속 수행하면 된다.
2. 장기적인 관점에서 착수해야 한다.
경기는 사이클이 있고 기술혁신과 소비자 기호변동이 심한 사업일수록 더욱더 긴 안목이 필요하다.
3. 철저한 경제성 검토
막연히 새 기계를 사서 자동화하고 고성능 제품을 만든다는 망상을 버려라. 가장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품질에 고장이 적으며 시장성이 넓은 제품을 만들도록 모든 면을 감안해야 한다. 목표를 세워놓고 합리적인 설비를 자져다 합리적으로 경영하라. 최신의 설비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인 설비는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첨단 선진국과의 격차 좁히기
일본의 기술자들은 삼성의 반도체 개발 성공을 두고 이론이 분분했다. 도대체 아무 것도 없는 한국이 어떻게 해서 최단시간 내에 그처럼 빨리 반도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화제의 초점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경제적 타산이나 위험을 초월하여 국가적 견지에서 첨단기술에 도전한 삼성의 확고한 기업정신이 있었다.
둘째, 바이폴라 IC가 주 제품이었지만 부천 IC 공장의 10여 년 경험과 인력의 축적이 잇었다.
셋째, 삼성이 VLSI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자 세계경제가 호황으로 전환하여 반도체 산업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넷째, 최신.최고이면서 최저가의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다섯째, 재미 한국인 박사의 사심 없는 조국애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참여로 고도의 두뇌집단과 기술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섯째, 여자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근면한 노동력 확보 및 훈련이 가능했다.
일곱째, 어려운 입지조건에 적합한 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여덟째, 긴축정책 속에서도 각 금융기관의 각별한 이해와 협력을 얻어 소요자금을 순조롭게 조달할 수 있었다.
환경사업도 엄연한 장사
1986년 7월 작고하기 1년 전 이병철은 용인자연농원을 방문했다. 자연농원에는 살구동산에 꽃이 활짝 피어 은은한 꽃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병철은 그 꽃향기를 맡으며 임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이렇게 좋은 살구동산에 꽃이 피면 장관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꽃을 볼 수 있도록 관리하되 적어도 살구 판매를 통해서 적자는 면해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적자를 내가면서 꽃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병철은 철저한 상인이었다. 그는 부도를 내는 기업인은 ‘역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기업경영을 잘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삼성비서실의 태동
이병철은 작고하기 1년 전인 1986년 7월 7일 일본의 주간지인 ‘일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삼성비서실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자신이 어떠한 의지가 있는 결정이라도 거기에는 항상 불확실한 요소가 있으며 경영자의 판단은 직감이나 육관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영자 개개인의 판단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판단력의 조직화가 중요합니다. 특히 한국은 기업의 역사가 짧고 질량 면에서도 전문경영인이 부족합니다. 각 그룹이 전문 분야별로 스태프 조직을 갖고, 그룹 차원에서도 비서실을 두어 젊고 유능한 인재를 모아 전문적인 지원, 조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부실은 사회적 죄악
이병철의 인사방침은 온정주의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이다.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 조치된다. 이병철 회장은 인재를 아꼈지만, 기대에 못 미치거나 능력이 없다고 최종 판단된 인재는 가차없이 사표를 받았다. 이병철의 인재관은 이것이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 사장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
경영자의 조건
이병철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잇어야 한다.
3. 신망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이병철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급적 이러한 조건에 맞는 인재를 고르긴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사람을 뽑으면 그 사람을 가르치고 교육시켜서 한 사람의 유능한 경영자를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한 면에서 이병철은 인재제일의 삼성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에 따라 경영자는 첫째, 덕을 갖춘 통솔력, 즉 인격적으로 모범을 갖출 수 있는 고결한 인품, 이것을 사장의 첫째 자질로 꼽았다. 고결한 인품이란 사람의 단점이 아닌 장점에 눈을 돌려 누가 옳으냐가 아니고 무엇이 올바르냐는 것이다. 이병철은 기업의 적자를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그 적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화와 단결이 되지 않는 기업이었다. 호암 리더십의 핵심은 ‘직접 일을 맡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을 갖게 하는 것’이다. 덕망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영자는 의사결정에 관한 한 부하직원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적시한다. 부하직원의 말을 경청해서 중지를 모은 것이야말로 지혜경영의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경영자의 실천 요강
1.교육의 중요성
삼성이 앞으로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재양성만이 살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재와 교육내용이 더욱 좋아져야 한다.
2. 부정을 막아야 한다.
부정은 먼저 교육을 통해서 막아야 한다. 부정의 범위가 처음에는 말단직원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임원 선까지 이르고 있다. 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데도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곤란하다. 회사에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회사가 망하고 회사가 망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각 회사는 부정을 막기 위하여 사전에 제도, 조직, 체크시스템을 점검하고 감사까지 해서 철저히 부정을 막아야 한다.
3. 기술도입에 역점을 두어라.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빠른가, 아니면 우리가 자체개발하는 것이 빠른가. 결론은 자체개발만으로는 너무 늦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선진국 대기업들과의 기술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의 기업들은 연구소를 강화해서 외국의 기술을 도입, 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4. 품질개선에 우선을 두어라.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품질관리를 통하여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길밖에는 없다.
5. 생산관리에 합리화를 기하라.
생산관리에서 원가절감 요소를 찾아내고 기술을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6. 운영합리화를 기하라.
각 사는 조직이 비대하고 복잡해짐에 다라 낭비가 많아졌다. 조직을 재정비해서 운영에 합리화를 기하도록 하라.
7. 신상필벌을 엄격히 지켜라.
인사관리의 요체는 신상필벌을 제대로 하는 데 잇다.
8. 사업부제를 철저히 하라.
사어부제를 철저히 해서 목표를 분명히 주고 그 실적을 평가하도록 하라.
9. 컴퓨터를 최대한 활용하라.
각 사 업무의 전산화가 이루어져야 경영합리화가 가능하다. 전산화를 적극 추진하라.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1982년, 삼성은 좀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원을 교육시키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종합연수원을 만든다. 종합연수원에서는 사원의 채용기준, 교육, 훈련, 보수, 평가 등을 책임지고 있었다. 삼성은 매년 사원 한 사람에게 8천만원이 드는 지역전문가제를 도입하여 총16백억원을 들여 2천명의 사원을 전세계에 파견했을 만큼 사원의 국제화에 역점을 두었다. 이병철은 인재를 뽑고 길렀으며, 그들을 믿었다.
용인술의 비결
‘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약 5퍼센트는 탈락하고 30퍼센트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약 65퍼센트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 사원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현재 삼성의 교육방식은 과거에는 강의식 교육이 40퍼센트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10퍼센트로 줄었고, 90퍼센트는 실습과 체험학습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21세기가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필요로 하는만큼 교육내용도 달라진 것이다.
일의 경중와 완급을 가려라.
나더러 작은 일을 너무 챙기고 따진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일을 할 줄 모르면 큰 일도 할 줄 모르는 법이다. 큰 일은 오히려 실수가 없는 법이다. 처음부터 충분히 준비를 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을 소홀히 취급하는 동안에 큰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예를 들어 돼지 한 마리가 일본에서는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한국에서는 여덟 마리밖에 낳지 못한다. 바로 이 한 마리의 차이에 대한 원인규명이 되지 않으면 양돈사업은 언젠가 무너진다. 천리제방이 개미구멍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거과 같은 이치아디. 이것이 바로 경영의 요체이다.
이병철은 이처럼 작은 일에 더욱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영에 임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2년 가을 그가 반도체공장을 방문했을 때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약간의 미세한 먼지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장을 한번 다 둘러보고 난 후 이병철은 사장단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VTR공장, 반도체공장에 먼지가 있다. 먼지가 있다는 것은 곧 제품불량의 원흉이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잇다. 공기 중에 떠 있는 먼지를 무심히 보고 넘기는 경영자들의 정신적 먼지가 도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공장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만전을 기하라. 미비점, 개선점 등 고쳐나가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이병철은 현장을 둘러보고 작은 머지가 쌓여서 제품을 망치고 조직을 망치며 기업을 무너뜨린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병철 경영철학
기술은 돈보다 중요하다.
선대 회장께서는 사업을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윤이 나면 당신의 승리이고 손해가 나면 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학자들이 현실감 없는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제지하지 않고 끝까지 다 듣고는, 그가 돌아간 후 참석 임원들에게 ‘저 사람 말은 50퍼센트만 새겨듣거라’하고 말슴하셨습니다.
부국론
당시 이병철이 한국이 부자나라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로 제시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국가발전의 기관차적 역할을 맡아야 할 집단은 역시 대기업이다. 우선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미국이나 일본의 강력한 기업과 싸워서 이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장사꾼과 기업인을 천시하는 사회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1500년대 말부터 기업인과 상인을 사무라이보다도 더 우대하는 풍토가 이루어졌고, 미국이나 유렵의 경우도 기업가는 사람을 고용하고 새로운 재화를 창출시키는 시대의 리더로서 평가받는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은 예부터 사농공상의 유교적인 관념에 얽매여 기업가와 상인을 천시하는 풍토가 있었다. 이러한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한국이 진정한 공업국가로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산업정책이 장차 부가가치가 높은 경박단소형의 첨단기술산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대로 이병철이 타계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 첨단산업 제품으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병철은 이미 20년 전에 이러한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국가는 기업인들이 산업활동에 전념할 수 잇도록 투자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또한 수출을 잘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자원이 없는 국가이므로 먹고살 길이 수출밖에 없기에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의 개발과 수출을 도와주는 정책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병철은 훌륭한 경영자의 양성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포항제철의 박태준이나 현대그룹의 정주영, 미국 크라이슬러자동차의 아이아코카 등의 예를 들면서 유능한 경영자가 있어야 기업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여섯째, 이병철은 기술의 도입을 강조한다. 첨단기술의 개발이야말로 세계를 재패할 수 있는 원동력이므로 기술의 진보가 곧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노사협력과 과감한 교육제도의 개혁, 그리고 중소기업의 육성을 곱았다.
이병철 어록
기업이 귀한 사람을 맡아서 훌륭한 인재로 키워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게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실경영과 마찬가지로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인재의 양성은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 데만 있지 않고 이들을 묶어주는 구심점, 즉 기업인의 인격과 영도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1976년 11월 전경련 회보 ‘나의 경영관’중에서
어느 사업이나 실패의 위험은 다 있는 법이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안고 일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1980년 7월 전경련 최고경영자 연수회의에서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뿐이라고 한다. 첫째로 남이 다 만드는 물건을 누가 싸게 만드느냐, 둘째는 값은 같되 얼마나 품질을 좋게 만드느냐, 셋째는 좋은 품질을 누가 남보다 앞서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1983년 2월 전자반도체 회의에서
마지막으로 가는 시간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거인의 77년 생애가 끝난 것이다.
평생 삼성과 각축전을 벌이며 늘 경쟁상대에 있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조사를 했다. 두 사람은 사업상에서도 라이벌이었지만 골프를 칠 때도 라이벌이었다.
호암의 승부에 임하는 자세는 단적으로 골프를 칠 때 드러난다. 호암은 사업상의 경쟁뿐만 아니라 운동경기에서도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이는 단순한 승부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의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스스로 용인을 못하는 것이었다. 사업을 하다보면 반드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도 있고, 정교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재추진을 해야 할 때도 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삼성이 굳건히 그 위치를 지키고 있는 데는 바로 호암이 승부에 임할 때 갖고 잇던 이러한 자세가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다같이 이로워지는 길
이병철은 1980년 7월 3일, 전경련 ‘최고경영자 연수회’의 강연회에서 사업은 생산자, 특약점, 소비자, 원료공급자 모두가 이익을 보는 공존공영의 원칙을 지켜야 번영할 수 잇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은 지난 1985년 KBS TV에서 방영된 일요방담에서도 나타난다.
공존공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가 숱하게 이야기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필요하다고 느끼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가령 제당을 한다고 가정하면 원료를 파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을 항상 유익하게 해줘야 계속해서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또 시설재 역시 공급하는 분에게 적정한 이익을 보장해줘야 항상 알맞은 것을 공급받지 않습니까. 제품을 만드는 사람도 거기에 대한 생활비와 장래를 보장해주어야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물건을 파는 대리점도 이익이 남아야 대리점을 계속 운영할 것이고 소비자 역시 물건이 좋고 값이 헐해야 사지 비싸고 품질이 나쁘면 사겠습니까, 이것이 공존공영 아니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
이병철 자신이 자주 인용하던 말이 있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이병철은 살아생전에 정말로 많은 일을 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립하여 오늘날 삼성그룹의 기틀을 만든 후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설립했고, 1953년에는 제일제당을, 1954년에는 제일모직, 1958년에는 안국화재, 1963년에는 동방생명, 동화백화점, 1965년에는 삼성문화재단과 중앙일보를, 1966년에는 고려병원을 또 같은 해 12월에는 중앙개발을,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또 같은 해 12월에는 삼성산요전기를, 1970년에는 삼성 NEC를 1972년에는 제일합섬을, 또 같은 해 11월에는 신라호텔을 1974년에는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을, 1977년에는 삼성종합건설을, 또 그해 4월에는 삼성조선, 그해 8월에는 삼성정밀, 1978년에는 중앙엔지니어링, 1980년에는 한국전자통신, 1981년에는 한국안전시스템, 1982년에는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또 그해에는 호암미술관 등을, 1983년 6월에는 삼성시계를, 1985년에는 호암아트홀과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설립하는 등 살아생전에 37개의 기업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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